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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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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의사 조병국
Name : 송범주 | Date : 2013.02.19 18:47 | Views : 5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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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의사 조병국 "처음엔 피 묻은 고기인가 싶었는데…" (김윤덕 기자)

'버려진 아이들' 주치의로 50년간 살아온 '할머니 의사' 조병국

버려진 아이라면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라 하면 참 희망적이죠

할머니 주치의, 청진기를 다시 들다 - 6만명인지, 7만명인지

한 줌 숨 붙어 있으면 살려내는 일로 50년을 하루같이…그 생명 얼마나 귀한지

진료실 문틈으로 까만 머리 하나가 빼꼼 들어왔다 사라졌다. 이내 다시 얼굴을 내밀더니 그이에게로 냅다 달려간다. "원장님~" "진수 왔구나." 더러 주사를 놓는 바람에 그이만 보면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지만 그때뿐이다. 아이들이 겁낼까봐 흰 가운도 입지 않는 그이는 몸과 마음 모두 상처투성이인 아이들에게 산처럼 크고 바다처럼 깊은 품이다.

그새 50년이 흘렀다. 서울시립아동병원과 홀트아동병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의 주치의로 살아온 세월이다. 이 고되고 험한 일을 놓을 수 없었던 건 아이들과 함께 겪은 '작은 기적들' 때문이었다고 조병국(79) 박사는 말했다. "나라고 왜 떠나고 싶지 않았겠어요. 사람인걸. 그런데요, 참 희한하게도 그때마다 과학 하는 사람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지요."

조병국은 올해 삼성생명 공익재단의 '비추미 여성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정년퇴임 한 지 20년이 돼 가지만 변변한 후임 의사가 없어 아이들 곁을 지켜온 그였다. 홀트일산복지타운으로 조 박사를 만나러 가기 전 그의 50년 의료 일기인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삼성출판사)를 찾아 읽었다. '기적'이 그 안에 있었다.

“우리 예쁜 아기, 할머니가 뽀뽀해줄게.” 조병국 원장이 네 살배기 준희(가명)를 진료하던 중 아이가 칭얼거리자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다. 코스텔로 증후군을 앓는 준희는 오목 가슴에 음식을 삼키지 못해 배에 구멍을 뚫어 대체식을 투입하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청진기를 다시 들다

―비추미대상에 파라다이스상,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올해 상을 많이 받으시네요.

"소아과 의사가 아이들 돌보는 건 당연한데, 부모 없는 아이들 봐줬다고 칭찬하시나 봐요.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니 그런 것도 같고(웃음). 감사하지요."

―3년 전에 쓰신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를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책을 펴내면서는 이런 얘기를 누가 믿어주겠나, 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 고아들과 입양아들 고생했던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이 이해할까 싶었는데 마음에 와 닿았다니 감사해요. 돌아가신 박완서(소설가) 선생은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그분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하더군요. 나보다 두 살 위이니 같은 세대라 그러셨을 거예요."

―자서전으로 쓰지 않고 오로지 50년간 만나고 헤어진 아이들의 이야기로 채운 까닭이 있습니까.

"내 이야기란 게 뭐 있어요. 그 생명들이 소중하지.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어요.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는 일로, 한 줌이라도 숨이 붙어 있으면 살려내는 일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라요. 어떤 아이는 태반과 탯줄이 달린 채 피로 얼룩진 속바지에 싸여서 들어왔다고요. 처음엔 푸줏간 남자가 직원 식당으로 고기를 배달하는 건 줄 알았는데, 경찰이었죠. 핏덩이를 보고 처음엔 놀라 자빠졌는데 하도 많이 보니까…. 아이도 아이지만 자궁 수축이 되기도 전 출혈이 멈추지 않는 몸을 끌고 어디론가 도망쳤을 산모는 살아 있을까 걱정을 하고 그랬지요."

―50년간 6만명의 아이를 진찰하셨다고요?

"6만명인지, 7만명인지는 세어보지 않아 나도 잘 몰라요. 하루에 적게 보면 80명, 소아과 외래에 하루 223명이 온 게 최대였으니까. 100명 이상은 청진을 못해요. 귀가 아파서. 1972년만 해도 시립아동병원에 입원했던 3세 미만 아이들이 2300명이나 되었지요."

―유난히 버려진 아이들에게 질병이 많은 걸까요?

"추운 겨울에, 그것도 거리에 버려졌으니 당연히 그렇지요. 몇끼를 굶었는지도 모르잖아요. 보육원에 들어와도 일손이 모자라니 엄마처럼 일일이 가슴에 안고 우유를 먹이지 못하고 기저귀를 머리 옆에 괴어놓고 젖병을 물린다고요. 고개만 살짝 움직여도 젖병이 빠지니 흘러나온 우유는 기저귀에 다 스며들고 아기는 영양실조 되고요. 거기다 전염병까지 돌면…. 아이들을 쑥쑥 자라게 하는 건 쌀과 우유가 아니라 엄마의 다정한 어루만짐과 따뜻한 눈빛이에요."

―끝내 소생하지 못한 아이도 많았다고요.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70년대에는 그랬어요. 힘없이 사그라지는 생명을 지켜보며 사망진단서를 써야 할 때 나의 무능함을 탓했지요. 세상 누구보다 불행한 출생을 경험한 아이들인데 마지막 가는 길도 창호지 몇장에 싸여…. 내 손으로 서명한 사망진단서의 이름들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지금도 기도합니다."

―아이의 입양 서류에는 '~에 버려졌음'이 아니라 '~에서 발견되었음'이라고 기록하신다 들었습니다.

"'버려진 아이'는 슬프지만 '발견된 아이'는 희망적이잖아요. 미국 사람들한테 배웠어요. 그전만 해도 우리는 정직하게 '기아(棄兒)'라고 썼는데, 나중에 장성한 아이들이 그 단어를 보고 다시 상처를 받는다는 거예요. 제발 '어밴던(abandon;버리다)'이란 단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고 해서 80년대부터 고쳐 쓰기 시작했지요."

―정년퇴임은 1993년에 하셨는데 왜 여태 홀트에 남아 계십니까.

"후임 의사가 오긴 했는데 박봉에 노동 강도가 세니 몇 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나는 퇴직한 뒤 아들 딸 있는 캐나다로 가서 살려고 준비하는데 홀트에서 급히 전화가 걸려 왔지요. 다시 일해줄 수 없느냐고. 그래서 15년을 '전(前) 원장'이란 직함으로 더 일하다가 어깨가 너무 아파서 2008년에 완전히 청진기를 놓은 거예요. 그때 책을 썼고요. 그런데 홀트에서 또 전화가 옵디다. 별일 없으면 일산복지타운에 있는 장애아들을 봐줄 수 없느냐고. 딱 4개월만 도와주기로 하고 온 게 벌써 만 3년이에요. 징글징글한 인연이지요(웃음)."

7남매의 장녀, 전쟁 - 일찍 죽은 여동생 둘과 전쟁 고아들 보면서 다짐

"치료하는 능력을 기르자" 아버지가 의대 원서 찢자 몰래 도장 파서 입학

영혼의 소리에 울다 - 중증장애아인 현군이가 노래 부르면 울음바다

어떻게 더 많이 배우고 더 가진 이를 위로하는지… 하나님, 참 공평하지요

아이들이 희망이다 - 희망이라는 깜짝 선물

받지못하고 생을 포기하면 얼마나 억울한가요

母性이라는 마법 - 입양, 어렵지 않아요

아이의 닫힌 마음을 여는 마법은 누구에게나 있죠

―일산복지타운은 전에 일하셨던 홀트아동병원과는 다른 곳인가 봅니다.

"홀트를 해외 입양만 보내는 곳으로 아는 분들이 많은데, 장애인 치료와 복지에도 오랫동안 헌신해 왔지요. 일산복지타운은 장애아라 어디에도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로 시작했어요. 창립자인 해리 홀트는 장애인 아파트를 짓는 게 꿈이었는데, 딸(말리 홀트)이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영혼의 소리'에 울다

정신 지체와 발달 장애로 천방지축 날뛰던 현군이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영혼의 소리로'의 단원이 된 후부터였다. 홀트일산복지타운의 중증 장애인들로 구성된 합창단. 일주일에 세 번 합창단 연습이 있는 날에는 누구보다 침착하게 집중력을 발휘했다. 악보도 못 보고 글도 못 읽지만 아이는 지휘자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박자와 음정을 곧잘 따라 했고 마침내 합창단의 솔로가 되었다.

―현군이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 객석이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얘기가 책에 나옵니다.

"목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현군이가 어떻게 저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걸까, 거칠고 척박한 마음들에서 어떻게 이토록 맑은 눈물을 끌어낼 수 있는 걸까 생각했지요. 하나님, 참 공평하지요?(웃음)"

―현군이는 지금 어떤 일을 합니까?

"홀트특수고등학교를 나와 전문대 코스를 밟고 있지요. 전기 부품 만드는 기술자이지만 여전히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한 아이랍니다."

―뇌성마비였던 영수가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재활의학 전문의가 되어 박사님을 찾아온 이야기도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처럼 사지를 마음껏 움직일 수 없는 사람, 특히 아이들을 치료하고 싶어 했지요. 영수는 내게 또 한 번 기적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어요. 아내가 불임이라 첫아이를 입양했는데, 그러고 3년 뒤 임신을 한 거예요. 두 딸을 얼마나 잘 키우는지. 둘째 딸 이름이 뭔지 아세요? 말리 홀트와 내 이름을 딴 '말리 병국'이랍니다. 하하하!"

―50년간 아이들을 만나면서 '모성(母性)이 무엇일까' 고민했다고 쓰셨더군요.

"열 달 동안 피와 살을 함께 나누던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 즉시 버리는 엄마도 보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엄마도 보았지요. 엄마가 되는 데 임신과 출산 경험이 반드시 필요할까요? 아이를 품에 안고 눈을 맞추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모성애는 시작되지요."

―그런 위대한 모성들을 수없이 만나셨지요? 그들이 꼭 미국이나 스웨덴이 아니라 한국에도 많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그럼요. 그들이 또 대단한 지식인이나 부자도 아니에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죠. 한 아이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고,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를 찾아줄 마법 같은 힘은 누구에게나 있답니다."

◇母性이라는 마법의 힘

―그래도 입양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박사님 역시 '장애아는 첫째를 건강하게 길러본 경험이 있는 부모가 데려가는 게 좋다'고 충고하셨고요.

"그저 식구 수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뿐이라고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분들이 입양했으면 좋겠어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보다 더디 낫는다는 사실이죠. 무한한 포용과 인내가 필요해요. 입양 부모는 아이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안식처이자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주는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지요."

―파양하는 경우, 또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처럼 양부모의 학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이죠. 그래서 요즘엔 해외 입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어요. 입양된 아이 중에도 왜 자기를 타국으로 보냈느냐며 원망하는 경우가 있고요. 그런데 아동 학대는 친부모들에게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차라리 보육원에 그대로 놔두지 왜 자기를 해외로 보냈느냐고 원망하는 아이들은 당시의 보육원 형편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렇게 말하지요. 나는 조금 부족해도 멘토, 롤모델이 돼줄 수 있는 양부모,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 가족이 보육원보다 훨씬 좋다는 입장입니다."

―해외 입양 전면 금지령이 내려졌던 1989년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쓰셨습니다.

"곧 없던 일이 돼버렸지만 지난 몇십년간 내가 한 일이 고작 고아 수출이었나 하는 생각에 상처가 되더라고요. 우리는 그저 집 없고 병든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가정과 부모를 찾아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부모가 국내에 없으니 해외로 눈을 돌렸던 것뿐인데. "

―지금도 아이들이 원장님을 찾아오지요?

"그럼요. 처음엔 자기가 자랐던 고아원에 갔다가 자기를 마지막으로 진료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는 'Cho'(조)를 찾아 여기까지 오지요. 내가 '너 기저귀 차던 시절 고추까지 만져봤어' 하면 날 부둥켜안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섯 번 이상 내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으면 '당신이 한국의 내 엄마'라며 자랑스러워하지요."

―자기를 버린 부모를 원망하진 않습니까.

"그들이 한국을 찾는 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서이지 부모를 찾아 원망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자기를 버려야만 했을 때 엄마가 외롭게 겪었을 고통을 안쓰러워하지요. 이렇게 잘 컸으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러 왔는데 부모는 차마 자식을 볼 면목이 없어 나타나지 않는 거고. 열의 아홉이 그렇게 얘기해요. 대견하지요."

 

“이 아이들에게도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장애아들의 보금자리인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조병국 원장. 예전보다는 일과가 훨씬 여유로워져서 아이들과 산책하며 웃는 시간이 많아졌다. / 이태경 기자 ◇전쟁, 그리고 국제 거지

1933년 평양에서 태어난 조병국이 연세대 의대를 나와 부모 없는 아이들, 병든 아이들의 주치의가 된 건 그의 집안 내력과도 관련 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외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생업을 뒷바라지한 자선사업가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선교사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나와 교직에 몸담았다. 7남매의 장녀인 그가 의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한 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은 여동생들, 그리고 전쟁 때문이었다. "동생 하나는 코피가 멈추지 않아 죽었고, 또 다른 동생은 홍역에 폐렴이 겹쳐 세상을 떠났어요. 어머니가 관 뚜껑을 만들어 덮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피란길에 본 수많은 아이, 죽은 엄마의 등에 업혀 울고 팔이 잘린 채 기찻길에 널브러진 아이들을 보면서 맏이인 나는 부모 없이도 동생들을 돌볼 수 있는 능력, 아픈 아이들을 치료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 같아요."

―'조병국'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기독교 집안인 데다 남녀 차별 의식이 없던 아버지가 딸들에게도 돌림자를 주셨어요. 빛날 병에 국화 국. 천생 남자 이름이니 호적에 사내아이로 잘못 기재돼 있는 걸 네 살 때 발견하고 다시 고쳤답니다."

―아버지께서 의대 진학을 반대하셨다고요.

"영문과나 약대가 여자에게 더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의대 입학원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시길래 아버지 도장을 몰래 판 뒤 내 마음대로 입학원서를 다시 만들어 제출했어요. 공문서 위조죠(웃음). 지금도 생각하며 웃는 일은 면접시험이에요. 의과대학에 왜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묻는데 내가 '유아사망률을 낮추고 싶어서'라고 거창하게 대답했다는 것 아닙니까."

―대학 졸업 후 실습을 극빈자 아이들을 돌보는 동부시립병원과 홀트에서 하셨더군요.

"아이들을 만나면 에너지가 불쑥불쑥 솟았어요. 서울시립아동병원에 정식으로 취직하기 전까지도 홀트에서 토요일마다 봉사를 했지요. 숙명이었나 봅니다."

―시립아동병원 시절에는 '국제 거지'란 별명을 얻으셨다고요.

"잘해보겠다는 열정이 뻗쳤던 거죠. 남자 열하고 나 하나를 안 바꾸겠다고 원장이 말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어요. 독일 노르웨이 미국 등지에다 아이들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의료 기부를 받아내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더니 그런 별명이…."

―시립병원 시절 월급이 100만원이 안 됐다고 하더군요. 홀트아동병원 원장 시절에도 300만원 남짓이었다고 하고.

"국물에 멸치 한 마리라도 걸리면 그걸 숨겨뒀다가 먹을 만큼 병원 아이들 급식이 열악했어요. 그래도 우리 집 애들은 계란에 밥을 비벼 먹을 정도는 되니, 그게 마음에 걸려 월급 타면 계란 100개씩 사서 병원에 갖다 주었지요."

―부군은 연세대 의대 동창이셨지요?

"이비인후과 전공인데 내가 하는 일을 적극 도와줬어요. 우리 애들이 지능이 낮아 옷핀, 단추, 동전 같은 걸 막 삼키잖아요. 그러면 남편이 일하는 한양대 병원으로 데려가요. 외래환자들 진료가 얼추 끝나는 오후 4시쯤에. 둘이 함께 정년퇴임 하면 무의촌에 가서 진료하며 여생을 보내자고 약속했는데 그이가 너무 빨리 세상을 버렸지요."

―3남매 숙제 한번 못 봐줄 만큼 바쁜 엄마였는데 자녀는 불평하지 않았나요?

"건강했으니까 그걸로 됐지요. 주말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빵도 구워주고, 당직하는 날엔 아이들 데리고 병원에 갔어요. 입원한 아이들에게 밥도 먹여주게 하고,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게 해주려고. 유명한 인물이 되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사람 보면 도울 줄 알고, 잘난 척하지 않으니 그걸로 됐지요."

◇'희망'이라는 이름의 깜짝 선물

'얼마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에 갓 태어난 제 살붙이를 내버려야만 했을까. 아이를 가진 걸 원망하고 후회했을 어미의 자궁에서 열 달을 지내다가 내쫓기듯 태어나 버려진 아이가 감당했을 충격과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그래도 버려진 아이라고 손가락질하기엔 아직 이르다. 고아로 자랐어도 당당하게 삶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그들 하나하나가 바로 낮은 곳에서 피어난 희망이고 기적이다….' 〈'할머니 의사 청진기를 놓다' 중에서〉

―책에 '우리가 간절히 원할 때 신은 그 기도에 답한다'고 쓰셨습니다.

"의학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 의사들은 기적을 목격하죠. 깨어날 수 없는 사람이 깨어나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이 살아나는. 나는 그 기적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 버려지고 아픈 아이들이 모인 곳에 더 자주 일어나기를 바랐어요."

―신(神)의 존재를 믿으시지요?

"그 죄없이 죽어간 생명들이 다 어디에 가 있겠어요. 천국에 가서 천사처럼 평화롭게 살아야 공평하잖아요."

―신이란 결국 인간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내 팔십 생애를 돌아봐도 참 희한해요. 나는 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우리 외할아버지는 왜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와 글을 가르치고 시집까지 보내셨을까,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하며 원서를 찢어버렸는데 나는 왜 굳이 의과대학에 들어간 걸까, (서울시립아동병원 시절)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나를 신은 왜 살려주었을까…. 이제 와 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나 혼자, 내가 원해서 이뤄진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경제적 어려움으로 좌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학교수 부인이 결혼이 파경을 맞자 두 살배기 아들과 함께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뛰어들었어요. 엄마는 죽고 아이는 생명을 건졌으나 두 다리를 잃었지요. 장애가 있으면 입양도 어려워지니 내가 생모를 원망했다고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미국에서 의족과 의수 같은 장애인 보조기구를 처방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부부가 이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연락해온 겁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 아이가 롤러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내왔는데 너무나 감사해서 내가 사진에 얼굴을 묻고 울었어요. 실오라기만큼의 희망도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지만 정말로 눈 크게 뜨고 찾아본 걸까요. 희망은 삶의 어느 모퉁이에선가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요. 그 깜짝 선물을 받지 못하고 생을 포기한다면 얼마나 억울한가요."

―내년이 팔순이십니다.

"어느 입양아의 편지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지요. '지금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할 때.' 요즘 내가 딱 그 심정이에요. 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간호사들, 이름 모를 봉사자들에게 절을 하고 싶어요. 죽으려고 뛰어내리려는 순간 누가 곁에서 외마디 소리만 질러줘도 그 결심 바꿀 수 있지요. 그래서 이웃이, 친구가 필요한 거예요. 이 순간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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